운림산방은 첨찰산을 깃봉으로 수 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연무가 운림(雲林)을 이루었을 것이고, '연화부'를 지었던 소치의 사상으로도 운림(雲林)이라는 당호(堂呼)가 걸 맞았을 것이다. 운림산방은 첨찰산을 깃봉으로 수 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연무가 운림(雲林)을 이루었을 것이고, '연화부'를 지었던 소치의 사상으로도 운림(雲林)이라는 당호(堂呼)가 걸 맞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소치(小痴)는 미산(米山) 허형을 낳았고 미산이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의제 허백련이 미산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익힌 곳이기도 하다. 이와같이 유서깊은 운림산방은 소치(小痴) - 미산(米山) - 남농(南農) - 임전(林田) 등 4대에 걸쳐 전통 남화를 이어준 한국 남화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전통남화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운림산방은 조선조 남화의 대가인 소치(小痴) 허유(維)가 말년에 거처하던 화실의 당호로 일명 '운림각'이라고 한다.소치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호를 붙여준 것이며 젊었을때는 련(鍊)이라 했고 자는 마힐(痲詰)이다. 운림산방, 쌍계사, 상록수림이 한데 어우러진 이곳을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운림산방에서 약 150m를 오르면 1995년 8월 15일에 세워진 진도아리랑비가 아담하게 서있다. 소치는 1808년 진도읍 쌍정리에서 허임의 5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나 1893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소치는 어려서 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어 28세 때부터 두륜산방(현, 해남 대흥사)의 초의대사(草衣大師 : 張意恂) 밑에서 공제 윤두서의 화첩을 보면서 그림을 익히기 시작하여 33세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 밑에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하게된다. 비록 낙도에서 태어났으나 천부적인 재질과 강한 의지로 시(詩), 서 (書), 화(畵)에 능하여 40세 되던 1847년 7월 낙선제에서 헌종을 뵐 수가 있었고 헌종이 쓰는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는가 하면 흥선대원군, 권돈인, 민영익, 정학연 등을 비롯하여 권문세가들과 어울리면서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렸다. 1856년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소치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첨찰산 아래 쌍계사 남쪽에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 운림산방 앞에 있는 연못은 한면이 35m 가량되며, 그 중심에는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둥근 섬이 있고 여기에는 소치가 심었다는 백일홍 한 그루가 있다. 소치가 서화에 뛰어나 민영익은 '묵신(墨神)'이라 했으며 정문조는 여기에 시를 더하여 삼절(三節)이라 하였고, 김정희는 중국 원나라 4대화가의 한 사람인 황공망을 '대치(大痴)'라 했는데 그와 견줄만 하다고 소치(小痴)라 했다고 한다.
다산기념관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인물로 선정된 다산 정약용 선생의 18년 유배지인 강진 유배생활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곳이다.다산기념관은 다산선생이 생전에 남긴 친필 간찰과 저술, 주변 인물들의 자료를 수집·보관·전시하고 있으며, 다양한 디지털 자료들로 다산선생을 친밀하게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또한, 어린이와 가족·청소년·공직자와 단체가 참여하여 강진에서 다산선생의 생활을 느껴볼 수 있도록 다산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백련사의 본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이며 조선후기에 만덕사로 불리우다가 현재는 백련사로 부르고 있으며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명종(1170년)때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중창되었다.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8대사가 머물렀던 도량이며 고종 19년(1232년) 에 원묘국사 3세가 이곳에서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결사를 일으킨 유서 깊은 명찰이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겹처마인 다포식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이 삼존불은 중앙 본존불이 석가여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좌우의 불상은 보살상이 배치 되어야 하는데도 여래상을 안치한 점이 특이하다. ■ 백련사 대웅보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136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대웅보전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8국사의 도량이었으며, 명종때인 1170년경에 원묘국사에 의해 중수가 되었고, 조선 세종때 행호주지가 2차 중수를 하였으며 효종때 3차 중수를 하였다고 한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팔작집이고 추녀마다 4개의 활주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앞면 2개의 주두에 용두를 장식하여 단청과 함께 전체적으로 화려한 느낌을 주는 다포식 건물이다. ■ 사적비 백련사 사적비는 조정저(趙宗著)가 짓고, 1681년(숙종 7년)에 세워진 것으로, 2004년.1.26일자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 1396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신은 훼손되었으나 귀부는 그대로 남아있어 조정저의 비를 그 위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음을 볼때, 귀부는 고래시대의 것으로 비신은 조선 중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원구형 부도 이 탑은 사찰내에서 연대가 가장 오래된 탑으로 네모난 기단위로 공 모양의 탑신을 올리고, 탑신의 맨 윗부분에 연꽃무늬로 띠를 새겨 넣은 독특한 장식이 돋보이는 탑이다. ■ 백련사의 동백나무 숲(천연기념물 제 151호) 백련사 주변 5.2㏊면적에 7,0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군데군데 비자나무와 후박나무가 자리잡고 있으며, 나무아래에는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3,4월경 붉은 동백꽃이 만개 후 바닥에 떨어진 풍경이 장관을 이룬다. ■ 다산 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오솔길 이 오솔길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백련사의 명승 혜장선사를 만나기 위해 오가던 사색의 길이다. 길이는 800m이며, 도보포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길 주변은 동백나무와 차나무가 어우러져 있어 경관이 아름답고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걷기 코스로 제격이다. 오솔길 중간 지점에 2007년 5월에 세운 해월루(海月樓)가 있어 잠시 쉬어갈 수 있다. 다산 오솔길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선정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 탐방로’의 하나로, 삼남대로를 따라가는 정약용의 남도 유배길(55km)의 일부구간이기도 하다.
영랑 김윤식 선생은 1903년 1월 16일 이곳에서 김종호의 2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에는 채준으로 불렀으나 윤식으로 개명하였으며 영랑은 아호인데 문단활동시에는 주로 이 아호를 사용했다. 영랑 선생은 1950년 9월 29일 작고하기까지 주옥같은 시 80여편을 발표하였는데 그중 60여편이 광복전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이곳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쓴 작품이다. 영랑생가는 1948년 영랑이 서울로 이거한 후 몇 차례 전매 되었으나 1985년 강진군에서 매입하여 관리해 오고 있는데 안채는 일부 변형 되었던 것을 1992년에 원형으로 보수하였고, 문간채는 철거 되었던 것을 영랑 가족들의 고증을 얻어 1993년에 복원하였다. 생가에는 시의 소재가 되었던 샘, 동백나무, 장독대, 감나무 등이 남아 있으며 모란이 많이 심어져 있다. �안채 영랑생가는 선생이 1948년 서울로 이거한 뒤 몇 차례 전매되면서 원형이 일부 변형되었으나, 강진군에서 1985년 12월에 매입하여 안채와 문간채를 복원해 관리해 오던 중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252호로 지정되었다.(2007.10.12) 안채는 일부 구조가 변형되고 시멘트 기와로 변형되어 있던 것을 지난 1992년 군에서 초가로 복원하였다. 큰 방은 선생의 부친이 거처하였던 방이고, 좌측의 중마루가 있는 작은방은 영랑 선생이 결혼 후 거처하였던 방이다. �사랑채 영랑 선생이 작품 활동을 하던 공간으로 주옥같은 시 대다수가 이곳에서 탄생했다. 기둥과 서까래, 툇마루 등 옛 건물 구조가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전통 가옥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사랑채를 보면 전체의 모습이 조금 비뚤어져 있는데 ‘사개틀닌 고풍의 툇마루에서’라는 시를 연상해 볼 때 아마 이것은 선생께서 살아 계실때부터 비뚤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문간채 안채 맞은편에 보이는 곳이 문간채이다. 당초 건물은 철거되었으나, 영랑 선생의 4남 김현태의 고증을 얻어 1993년 군에서 복원하였다.� 영랑시비 당초 사랑채 우측 공터에 사회봉사단체인 강진군 번영회에서 대리석으로 만들어 세웠으나, 위치가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아 강진군에서 문간채 앞으로 옮겨세웠다. 영랑의 대표적인 시「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새겨져 있다.